역치
물건
팥떡이는 3개월에 왔다. 그 전에 다른 개와 훈련을 익혀둔 덕에 오자마자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키는 대로 따르게만 만드는 훈련은 아니었다. 머리를 쓰게 하고, 같이 놀고, 둘이 익숙해지는 쪽이었다. 데려오고 거의 처음부터 계속 같이 한 건 힐과 기본 오비디언스였다. 밖에서 안전하게 데리고 다니려면 필요한 통제이기도 했지만, 팥떡이한테는 머리와 몸을 같이 쓰며 나랑 놀고, 보상을 받고, 먹이를 먹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둘 사이의 유대를 쌓았다. 복종이라는 한 단어로는 다 안 담기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한 건 프리쉐이핑이다. 물건 몇 개를 바닥에 두고, 정해둔 하나를 건드리면 간식을 줬다. 내가 먼저 시키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처음엔 한참 걸린다. 팥떡이는 우연히 건드려서 간식을 먹어도 왜 먹었는지 모른다. 더 기다리면 어느 순간 스스로 알아낸다. 이걸 건드리면 간식이 나오는구나. 그때부터는 눈빛이 달라지고, 스스로 그 물건을 더 자주 더 또렷하게 건드리기 시작한다. 물건 하나를 알아내는 데 길면 이십 분 넘게 걸리기도 했다. 오히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이 훈련의 핵심에 가까웠다.
내가 그 흐름을 좋아한 이유는 머리를 써서 피곤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팥떡이가 세상 안에서 어떤 규칙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한 행동이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가 반복되면서 하나의 구조를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흐름. 나는 팥떡이가 답을 받아먹는 개가 아니라, 답을 찾아내는 개가 되길 바랐다.
친레스트도 가르쳤다. 내가 "터치!"라고 말하면 팥떡이가 내 손바닥에 턱을 올리는 행동이다. 그땐 그냥 귀엽고 편해서 했다.
그릇
팥떡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밥그릇을 거의 쓰지 않았다. 밥시간이 되면 손에 사료를 쥐었고, 팥떡이는 그걸 내 손에서 와구와구 받아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기의 팥떡이한테는 사실상 밥그릇이 없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그 시간은 급여라기보다 상호작용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손바닥의 사료를 그대로 먹었고, 어떤 날은 잠깐 멈추고 나를 봤고, 어떤 날은 작은 행동 하나를 거친 뒤에 먹이가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먹이가 그냥 놓여 있는 게 아니라 나를 거쳐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릇에 담긴 식사는 빠르고 쉽다. 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손에서 나오는 식사는 다르다. 잠깐 멈춰야 하고, 나를 봐야 하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하고, 짧더라도 기다림과 집중을 거쳐야 한다. 먹이가 그냥 입으로 굴러들어오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해낸 뒤에 얻는 결과가 된다. 기다림 하나, 눈맞춤 하나, 이름 반응 하나, 매트 위에 올라가 멈추는 순간 하나. 이런 작고 쉬운 행동들이 사료 한 알과 연결될 때 식사는 단순한 공급이 아니라 참여와 성취의 구조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걸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하나는 나였다. 루틴이 흐트러졌고 일관성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했다. 바쁜 날이 생기고, 편한 방식을 택하는 날이 늘고, 한 번 그릇으로 주기 시작하니 그게 자연스러운 기본값이 됐다. 또 하나는 팥떡이였다. 원래 식탐이 엄청 강한 개는 아니었고, 어릴 때는 손으로 주는 사료를 굉장히 잘 먹었는데 크면서 점점 더 선택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손으로 줄 때도 예전만큼의 반응이 안 나왔고, 나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그냥 그릇으로 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실은 꽤 중요한 도구 하나를 조용히 놓아버렸다.
밥을 먹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일이라 쉽게 양과 성분으로만 보게 된다. 하루에 먹어야 할 양을 먹었는지, 사료를 바꿨는지, 변이 괜찮은지. 그것도 중요하다. 다만 밥에는 몸에 들어가는 영양 말고도 하루의 리듬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팥떡이에게 먹이를 먹는 일은 하루에서 가장 큰 보상 중 하나다. 장난감도 비슷했다. 늘 바닥에 있으면 그냥 배경이 되고, 나와 노는 시간에만 나오는 장난감은 물건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시간이 된다.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아무렇게나 열어두면 좋은 것들이 오히려 흐려질 수 있다.
쉼
나는 한동안 팥떡이를 잘 쉬게 하는 일과 충분히 지치게 하는 일을 거의 같은 말처럼 생각했다. 많이 움직이면 잘 쉴 거라고, 힘을 많이 쓰면 안정될 거라고, 그래서 늘 더 뛰게 해야 하나, 더 산책해야 하나, 더 놀아줘야 하나부터 생각이 갔다.
평소 산책은 리쉬를 하고 나간다. 안전을 생각하면 필요한 방식인데 그 안에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마음껏 뛰어놀지는 못하고, 숨이 찰 만큼 활동하지는 못하고, 어떤 날은 몸이 가진 에너지와 산책의 구조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반려견 놀이터에 갈 수 있을 때는 가서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문제는 평소에는 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을 때가 더 많고 여건이 안 맞을 때가 더 많아서, 결국 대부분의 날은 내가 만들어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루를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걸 거의 최대한 체력을 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뛰게 해줄 수 없으면 집에서라도 최대한 머리를 쓰게 해야 하고, 몸을 쓰게 해야 하고, 피곤해지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장시간 외출해야 할 때는 퍼즐 장난감도 꽤 자주 쓴다. 작은 칸들이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고, 어떤 칸에는 덮개가 얹혀 있고, 안쪽에 간식을 숨길 수 있는 구조다. 그 안에 잘게 자른 간식을 여기저기 넣어두면 팥떡이가 냄새를 맡고, 코로 밀고, 칸을 움직이고, 결국 꺼내먹는다. 처음에는 덮개를 잘 못 열었는데 천천히 계속하다 보니 이젠 입을 써서 덮개도 열고 안의 간식도 잘 꺼내먹는다. 몸을 크게 쓰는 활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시간도 아니다. 냄새를 따라가고, 구조를 이해하고, 앞발이 아니라 코와 입으로 문제를 풀고, 성공하면 바로 보상이 나오는 시간이다.
팥떡이가 집 안에서 조용히 누워 쉬는 모습을 보면 어떤 날은 안심이 된다. 오늘은 그래도 좀 편안한가 보다, 이제는 집이 자기한테 안전한 공간이구나. 그런데 또 어떤 날은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이게 정말 편안한 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 일도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건지. 오늘 하루가 너무 비어 있어서 그냥 멈춰 있는 쪽이 더 가까운 건 아닌지. 개는 원래 많은 시간을 자고 쉬는 동물이 맞는데도 나는 자꾸 걱정부터 하게 된다. 덜 움직인 건 아닌지, 덜 놀아준 건 아닌지.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 다른 걸 보게 됐다. 잘 쉰다는 건 단순히 피곤해서 멈춘 상태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 많이 뛰었다고 해서 곧바로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고, 크게 지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덜 만족한 하루였던 것도 아니라는 것. 개를 잘 쉬게 한다는 건 계속 자극을 넣는 일도 아니고 무조건 체력을 바닥까지 빼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팥떡이를 더 지치게 해야 하는 개로만 보지 않는다.
입
나는 같이 살던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처음이었다. 그 개가 처음 먹어보는, 눈이 돌아갈 만큼 맛있는 습식사료를 먹고 있었고, 나는 그릇 위치가 불편해 보여 조금 더 먹기 편하게 놓아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살짝 물렸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너무 크게 다가왔다. 서운했고, 화가 났고, 배신당한 것 같은 감정까지 한꺼번에 올라왔다.
지금의 나는 그 일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 개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개의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둘 사이의 소통이 실패한 것이었다. 개는 자기 앞에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먹고 있었고, 그 순간 거기에 갑자기 손이 들어왔다. 개 입장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경고였고, 의사 표현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걸 읽지 못했고, 물렸다는 사실만 붙잡고 상처받아 있었다.
개는 무는 동물이고, 입을 쓰는 존재다. 개가 물었다면, 혹은 물려는 시늉을 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왜 이 개가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다. 무는 행위만 막아버리면 소통의 통로 자체가 끊긴다. 경고를 할 수 있다는 건 아직 소통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걸 억압해서 경고 없이 바로 터지는 상황을 만드는 게 나는 오히려 더 무섭다.
소리
짖음이나 칭얼거림 이전에 이미 개는 굉장히 많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고개를 돌리고, 멈추고, 냄새를 맡고, 몸을 굳히고, 입을 핥고, 거리를 만들고, 다시 다가오고. 나는 예전엔 그런 것들을 잘 못 봤다. 그러다 보니 소리가 커진 뒤에야 얘가 지금 힘들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 같은 루틴으로 비슷한 시간에 산책을 하더라도 어떤 날은 팥떡이가 너무 심심한지 내게 와서 히융히융 소리를 낸다. 턱을 계속 내 몸에 대고 놀아달라고 소통하려고 한다. 심할 때는 날 보면서 짧게 왕 하고 짖는다. 그럴 때면 나는 바로 미안해진다. 그런데 동시에 이상하게도 고맙다. 그렇게라도 나한테 말을 걸어줘서. 그냥 안으로만 말라붙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해 오고, 턱을 올리고, 소리를 내고, 지금 뭔가 필요하다고 알려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자주 너무 늦게 이해한다. 그때는 그냥 지나간 일인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전혀 다른 뜻으로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토요일 아침이 그랬다. 평일엔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산책을 나가는데 주말엔 조금 다르게 하고 싶어서, 짧게 나갔다가 쉬만 하고 바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팥떡이가 엄청 낑낑댔다. 나는 또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더 놀고 싶어서, 루틴이 꼬여서, 주말인데 왜 벌써 끝났냐는 식으로 저러는 거겠지 하고 넘겼다. 나도 짜증이 났고 기다리게도 했다. 오늘은 좀 늦게 쉬고 싶었고, 내가 정한 흐름대로 가고 싶었다. 멈추질 않았다. 결국 못 참겠어서 8시쯤 다시 밖에 나갔고, 나가자마자 팥떡이는 바로 약간 묽은 변을 봤다. 배가 아팠던 것이었다.
내가 왜 그걸 그렇게 늦게 알아들었을까. 왜 또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단정했을까. 루틴을 안 지키려 해서 짜증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냥 아픈 거였다. 나는 아직도 팥떡이의 소통을 자주 늦게 알아듣는다.
놀이터
팥떡이는 어렸을 때 다른 개들을 정말 좋아했다. 잘 놀았고 관심도 많았고, 그 시기의 팥떡이를 생각하면 사회성이 없는 개라고 말하는 건 전혀 맞지 않는다. 다른 개만 보면 다 좋다고 달려드는 쪽이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몇 번 다른 개들과 싸운 적이 있었고, 한 번은 다른 개가 먼저 공격했는데 주변에 있던 개들까지 같이 달려들어서 팥떡이를 공격했던 적이 있었다. 나도 뛰어들어가서 말렸다. 그때의 팥떡이는 그냥 좀 안쓰러웠다. 원래 놀이터에 있으면 나한테 잘 안 오는 애였는데, 그 일 직후에는 나한테 와서 나를 올려다보고 내 옆에 붙어 있었다. 그걸 보면서 그래도 자기가 아는 사람이 나니까 나한테는 좀 의지하나 싶었다.
팥떡이는 평소에는 무던하다. 표정도 늘 좀 덤덤하고, 웬만한 일에 크게 놀라는 편도 아니고, 겉으로 보면 겁이 많은 개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리 건너는 걸 무서워하기도 하고 천둥 치는 걸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도 나한테 오는 게 아니라 혼자 어디론가 가서 덜덜 떨고 있다. 그것도 나랑 닮았다. 누가 옆에 있어도 혼자 견디는 쪽으로 먼저 가는 것.
크면서 반응이 달라졌다. 이제 산책 중에 다른 개를 보면 공격성을 보인다. 지금도 팥떡이는 다른 개를 싫어해서만 반응하는 게 아니다. 좋아하고, 놀고 싶어하고, 동시에 긴장하고, 기대하고, 좌절하고, 흥분하고, 그게 한꺼번에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다른 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과, 다른 개를 만나는 순간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닭가슴살
한동안은 개가 보이면 무조건 간식을 줬다. 다른 개라는 신호를 좋은 일로 바꿔보려는 거였다. 다른 개를 못 보게 하는 훈련이 아니라, 일부러 보게 하고, 표시하고, 먹고, 다시 돌아오게 하는 패턴이다. 팥떡이가 다른 개를 본다. 내가 "봤어" 같은 마커를 준다. 간식이 나온다. 그다음엔 조금씩 바뀐다. 다른 개를 보고도 다시 나를 보는 행동, 그러니까 보고-돌아오기가 보상으로 굳는다.
가끔은 됐다. 팥떡이가 멀리 개를 보고 나를 돌아봤다. 간식을 기대하는 얼굴로. 다른 개를 본다. 다시 나를 본다. 닭가슴살을 먹는다. 그리고 지나간다. 그런 날은 산책이 끝나고도 손에 남는 긴장이 덜했다. 그런데 안 되는 날은 정말 안 됐다. 개가 보이자마자 팥떡이 몸이 굳고, 줄이 당겨지고, 간식 냄새를 맡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귀만 살짝 움직이거나 아예 안 들리는 것처럼 앞만 봤다. 그런 날은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간식이고, 같은 말이고, 같은 산책인데 어떤 날은 되고 어떤 날은 안 됐다.
방법보다 먼저 거리가 문제였다. 개한테는 역치라는 게 있다. 어느 거리까지는 아직 생각할 수 있고, 어느 거리부터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 지점을 지나면 간식의 가치가 떨어지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잘 들어오지 않고, 새로 뭘 배우기 어렵다. 팥떡이가 닭가슴살을 안 먹던 건 고집이 아니었다. 나를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너무 가까웠던 거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개는 거리를 내가 못 정한다. 나는 매번 이미 늦은 자리에서 간식을 주고 있었던 거다.
그걸 알고 나니 산책에서 봐야 할 게 달라졌다. 다른 개와 몇 미터 떨어졌는지만 보는 게 아니었다. 팥떡이가 간식을 받는지, 씹는 속도가 느려졌는지, 목이 앞으로 길어졌는지, 등이 굳었는지, 한번 보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봐야 했다. 같은 거리라도 어떤 날은 괜찮고 어떤 날은 아니었다. 비가 온 날, 공사 소리가 큰 날, 아침에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서 놀란 날은 기준이 달라졌다. 작은 긴장이 몇 개 겹치면 평소엔 괜찮던 거리도 갑자기 너무 가까워졌다.
압박
통제라는 말은 보통 부정적으로 들린다. 압박도 그렇다. 그런데 나는 그 말들을 완전히 나쁘게만 느끼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통제받는 일이 어떤 때는 편안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내가 그 사람을 믿고, 그가 나보다 더 넓게 보고 있다고 느끼고, 그가 정한 규칙 안에서 내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가 있다. 내가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 내 판단을 잠깐 내려놓고 그 사람의 기준 안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각.
내가 압박에 끌린 것도 개 훈련 이전에 내 경험 때문이었다. 어려운 일을 앞에 두고 있을 때, 누군가가 좋게만 이끌어주는 것보다 강하게 기준을 걸고 더 밀어붙여줄 때 내가 더 움직인 적이 있다. 피하고 싶어도 조금 더 버티게 만들고, 내가 스스로 낮춰둔 한계를 쉽게 받아주지 않는 사람. 그런 압박을 지나 해냈을 때는 누가 나를 가만히 믿어준 것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 생겼다. 내가 생각한 한계보다 조금 더 갈 수 있다는 걸 몸으로 확인하는 느낌. 그게 좋았다.
그러니까 내가 찾던 것은 개를 겁주거나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해볼 수 있는 자리에서 조금 더 해보게 만드는 힘이었다. 프리쉐이핑에서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친레스트에서 기준을 한 단계 올리는 것. 그런 압박은 벌이라기보다 과제에 가깝고 동기부여에 가깝다.
현실은 그렇게 깨끗하게 나뉘지 않는다. 자유라는 말 뒤에 방치가 붙어 있을 때가 있고, 배려라는 말 뒤에 회피가 붙어 있을 때가 있다. 통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통제는 폭력이고, 어떤 통제는 기대도 되는 구조다. 문제는 둘이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는 데 있다. 타견반응 앞에서는 그 구분이 더 쉽게 흐려진다. 내가 의도한 게 해봐, 할 수 있어에 가까운 푸쉬여도 팥떡이가 이미 긴장한 상태라면 다르게 받을 수 있다. 팥떡이가 다른 개를 봤다. 그 순간 줄이 짧아졌다. 내 목소리가 낮아지고 손이 거칠어졌다. 이 순서가 몇 번 반복되면 팥떡이한테는 다른 개와 내 불편함이 같이 묶일 수 있다. 좋은 푸쉬를 그렇게 정교하게 걸 자신이, 다른 개 앞에서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보류하는 건 압박 전체가 아니다. 타견반응 앞에서 압박을 먼저 쓰는 일이다. 멀리서 보고, 먹고, 빠져나오고, 쉬고, 다음 날 다시 한다. 이게 너무 느려 보였다. 그래도 지금 팥떡이한테는 그 느린 쪽이 맞았다.
골목
팥떡이는 평소엔 머리를 잘 쓴다. 간식을 바닥에 두면 어떻게 꺼내 먹을지 한참 궁리하고, 내가 멈추면 같이 멈춰서 내 얼굴부터 본다. 집에서는 신중하고, 산책길에서도 웬만한 소리에는 한 번 확인한 뒤 다시 냄새를 맡는다. 다른 개가 보이면 그 속도가 달라진다. 냄새 맡던 걸 멈추고, 머리가 올라가고,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런데 이걸 팥떡이 반응으로만 보면 빠지는 게 있다. 내가 먼저 바뀌는 날이 있다. 멀리서 개가 보이기 전부터 골목 끝을 보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줄을 짧게 잡고, 공원 입구에서 벤치 아래와 코너 너머를 훑는다. 아직 팥떡이는 냄새를 맡고 있는데 내 손이 먼저 긴장한다. 팥떡이는 그런 걸 잘 읽는다. 내가 숨을 줄이고, 걸음을 끊고, 줄을 짧게 잡으면 팥떡이도 머리를 든다. 실제로 앞에 개가 있어서 그럴 때도 있지만, 내가 그럴 것 같다고 예상해서 먼저 만든 긴장도 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저쪽에서 사람 몇이 시끄럽게 떠들며 오는 걸 보고 내가 먼저 길을 돌렸다. 팥떡이는 그 사람들한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냄새를 맡고 있었고, 줄도 느슨했다. 그날 보인 건 팥떡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먼저 긴장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불편했던 건 사람 몇 명이 아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내가 먼저 산책줄에 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길에 사람이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산책할 때도 긴장을 잘 하고, 주변 자극을 빨리 흡수한다. 산책하다 보면 팥떡이가 가끔 어떤 사람에게 뜬금없이 짖거나 몸을 앞으로 던질 때가 있는데, 가만히 돌아보면 나 역시 지나가다 거슬리는 사람이나 좁은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보면 순간적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하루는 그 감정이 올라오는 바로 그 순간에 팥떡이도 같은 대상을 향해 달려들며 짖었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묘하게 겹쳐 보였다. 내가 긴장한 날엔 팥떡이도 세상을 더 날카롭게 읽었고, 내가 예민해진 날엔 팥떡이도 더 빨리 흔들렸다. 나는 한동안 팥떡이 상태만 읽으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 상태도 같이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등
나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쪽이 좋다. 이건 고쳐야 할 결핍이라기보다 내가 고른 방향에 가깝다. 팥떡이와 살게 된 뒤로 그 방향은 더 선명해졌다. 새로운 사람들을 굳이 만들지 않고, 설명해야 하는 관계를 늘리지 않고, 내 하루의 중심을 팥떡이 루틴에 두는 것. 나는 그게 좋다.
가끔은 팥떡이와 내가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세상과 싸우는 쪽보다는 세상을 덜 상대해도 되는 둘만의 자리가 생긴 느낌에 가깝다. 밖에서 보면 조용한 생활이고, 안에서 보면 꽤 단단한 생활이다. 하네스, 물그릇, 밥그릇, 정해진 산책로, 정해진 귀가 시간, 정해진 우선순위. 내가 크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고, 누군가에게 내 상태를 매번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다. 그 느낌이 꽤 좋다.
다만 내가 세상을 덜 상대하고 싶다는 것과, 팥떡이가 세상을 전부 피하며 살아도 된다는 말은 다르다. 병원 문도, 엘리베이터 문도 내가 원하는 만큼 깨끗하게 비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자리를 굳이 안 만들며 살 수 있지만, 팥떡이는 내가 미처 못 비운 그 자리에서 자기 몸으로 버텨야 한다.
산책
훈련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자꾸 이상해진다. 오늘은 훈련을 했고, 내일은 못 했고, 이번 주는 잘했고, 다음 주는 망했고. 그런 식으로 세면 금방 질린다. 훈련은 생활 쪽에 더 가깝다. 같은 시간에 나가고, 같은 기준으로 빠져나온다. 내가 피곤한 날에도 대충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구조다. 마음은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좋은 날엔 다 잘할 것 같고 나쁜 날엔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러니 마음보다 규칙이 조금 더 낫다. 좋게 말하면 생활 방식이고, 덜 좋게 말하면 내가 나를 못 믿어서 만드는 장치다.
아침 출근도 여기 들어간다. 나는 보통 아침 7시에 집을 나가고 저녁 6시쯤 돌아온다. 그 사이 팥떡이는 쉬를 못 한다. 그래서 아침 산책을 최대한 늦게 끝내려고 한다. 시간만 보면 맞는 선택인데, 산책이 끝나자마자 내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고 급하게 나가는 흐름이 반복되면 그 자체가 출근 신호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아침에 필요한 건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덜 분주한 순서다. 분주하게 바쁜 척하지 않기. 미안한 표정으로 오래 달래지 않기. 나가는 일을 큰 사건처럼 만들지 않기.
팥떡이는 타견반응이 생긴 뒤로 다른 개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졌고, 어릴 때부터 봐왔던 흑봉이한테만 열려 있는 편이었다. 최근에는 가호라는 개를 만났다. 6살인 가호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팥떡이는 생각보다 크게 무너지지 않았고, 나도 계속 급하게 거리를 계산하고 다음 상황을 미리 막아야 하는 쪽으로만 끌려가지는 않았다. 같이 뛰어놀고 서로를 단번에 받아들인 관계라기보다, 같은 공간 안에서 각자 쉬고 움직이고 다시 멈출 수 있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크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게 내게는 꽤 컸다. 가호를 만날 때마다 생각한다. 타견반응 작업의 목표는 특별한 성공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 일 없는 시간을 늘리는 일이다.
좋은 산책은 가까이 가는 산책이 아니라, 돌아와도 회복이 남아 있는 산책일 때가 있다. 다른 개를 아주 멀리서 보고, 팥떡이가 나를 한 번 보고, 닭가슴살을 먹고, 서로 지나간 뒤에도 줄이 다시 느슨해지는 날. 아무도 보면 모를 정도로 작은 일이지만, 그런 날이 쌓여야 몸이 조금씩 다른 예상을 한다.
팥떡이는 하루의 대부분을 나와 같은 공간에서 보낸다. 내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내 근처에서 자고, 내 근처에서 쉬고, 내 동선 안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 점에서는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그 가까움을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겼다. 같은 공간에 오래 있었다고 해서 저절로 가까워지는 건 아닌데 나는 자주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넘겨버린다. 늘 곁에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고, 늘 먼저 챙기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지나가게 둔 시간들이 있었다. 가까움은 그냥 쌓이지 않는데 익숙함은 그냥 쌓인다.
나는 그동안 팥떡이를 늘 제일 먼저 두고 살아왔다. 그런데 제일 먼저 둔다는 것과 늘 또렷하게 보고 있다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그 둘은 완전히 같지 않다. 방법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팥떡이가 지금 어느 거리에서 아직 나를 볼 수 있는지 읽는 일이고, 더 어려운 건 내가 먼저 줄을 짧게 잡고 있지는 않은지 보는 일이다. 둘 다 아직 잘 못 읽는다.
처음엔 훈련법을 더 알고 싶어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훈련법이라는 말 안에 팥떡이만 들어 있지는 않다. 역치니 거리니 하는 말은 산책줄을 잡은 내 손, 아침에 급하게 나가는 순서, 내가 세상을 덜 상대하려고 고른 생활까지 같이 건드린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건 좋다. 다만 등진 채로도, 팥떡이가 지나가야 할 길은 남아 있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개가 보이기 전에도, 내가 먼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한 번 더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