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
이 감정들을 다루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살고 있다
한 번의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좀 견딜 만하다
괴로움, 외로움, 우울함. 이런 감정들을 다들 어떻게 버틸까.
나한테 괴로움은 보통 과거에서 온다. 어떤 게 갑자기 떠오를 때, 그 떠오름이 그 자리에 한참 머무를 때, 그게 괴로움이 된다. 그럴 때 나는 액땜이라는 걸 생각한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고 언젠가는 나도 무너질 때가 올 텐데 지금이 아마 그때구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좀 나아진다. 지금 이 괴로움이 한 번의 액땜이라면, 그 다음은 좀 괜찮을 거고, 내가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일들도 다행히 잘 풀릴 수도 있겠지 하는 기대가 같이 따라온다. 이런 식의 기대가 정말 그렇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적어도 그 자리를 지나가는 동안에 내가 좀 덜 흔들린다는 정도는 분명하다.
나는 늘 과거 어딘가에 매여 있거나 미래만을 탈출구처럼 기다리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개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게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으로 지금을 사는 일이 어떤 건지 알게 됐다. 개들한테는 지나간 일이 무겁지 않고, 오지 않은 일도 두렵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만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살고, 나는 개들한테 많은 걸 배운다.
외로움은 평화로움에 대한 댓가다
외로움은 그보다 더 오래된 감정이었다. 내가 외로움을 어디서부터 느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시작점은 어른이 되고 나서가 아니라 아주 어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외로움이 어릴 때부터 내 안에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나는 복잡함보다 단순함이 좋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피로함보다 그냥 혼자 외롭게 있는 게 더 좋다고 느끼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외로움은 어떤 식으로는 그 평화로움에 대한 댓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 가까이 사는 일에는 그만큼의 따뜻함이 있는데, 나는 그 따뜻함 대신에 외로움을 받는 쪽이라는 거다. 그 자리가 별로 나쁘지는 않다.
어떤 도구는 영원히 통할 줄 알았다
우울은 좀 더 큰 결이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된 결이고, 그래서 지금의 나는 우울이라는 감정에 어느 정도 도가 텄다고 할 수 있다. 너무 우울했던 시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결국은 다 이겨냈고, 그때마다 꽤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울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든 통제 가능한 상태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그 시기들에 배웠고, 한동안은 그게 내 가장 큰 자신감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웃긴 건, 우울을 계속 이겨내도 어느 순간 그게 안 통하는 시기가 온다는 점이다. 나한테 가장 든든한 방법이었던 건 달리기였다. 우울할 때마다 나는 뛰러 나갔고, 일주일 내내 매일 뛰는 시기도 있었다. 달리는 동안에는 우울이 단순하게 짓밟혔고, 그 단순함을 믿고 살았던 시기가 꽤 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믿고 있었던 달리기가 더 이상 내 우울을 낫게 해주지 않는 때가 왔다. 똑같이 뛰고 똑같이 땀을 흘리는데 끝나고 나서도 그대로 무거운 자리에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어떤 도구는 영원히 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끝은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사는 게 두려울 때가 많았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그리고 뭐가 그렇게 소중했길래 그 두려움을 그냥 내려놓지 못했는지를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잘 정리가 안 된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의 나는 무언가에 자꾸 매달려 있었고, 그 매달림이 두려움을 만들었다는 정도다.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끝낸 사람들의 마음이 잘 와닿지 않았다. 다른 세상의 일처럼 보였고, 나는 거기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왔다. 무언가가 너무 두려울 때, 혹은 너무 힘들 때, 죽음이라는 게 어떤 종류의 출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 무서운 게임을 하다가 그 무서움을 견디지 못해 그냥 꺼버린 적이 있다.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서 안도하는 일도 있다. 죽음이 그런 식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시점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 나는 그게 결국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고, 오히려 그 이후로 두려운 게 많이 줄어들었다. 사는 게 힘들었는데, 그 끝이 결국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 이상 힘들 게 없어졌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한 발 물러나고 보면, 그동안 내가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던 일들이 사실은 그 정도로 큰 일이 아니었다는 게 같이 보이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산책 시간이 먼저 온다
어떤 날에는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산책 시간이 먼저 온다. 내가 안에서 어디까지 가라앉고 있든, 팥떡이는 평소처럼 아침을 기다리고, 간식 봉지 소리에 눈이 커지고, 산책줄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어도 몸을 먼저 흔든다. 밖에 나가면 늘 걷던 길에서도 새로 발견한 냄새 앞에 오래 멈춰 서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하루를 좋아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조금씩 그쪽으로 끌려간다.
팥떡이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얼굴로 오늘을 산다. 맛있는 걸 보면 신나고, 산책을 나가면 즐겁고, 내 옆에 와서 몸을 기대다가도 금방 다시 자기 시간을 보낸다. 그게 너무 단순해서 가끔은 부럽고, 또 너무 선명해서 고맙다. 나는 삶을 견디는 방법 같은 큰 말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앞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은 팥떡이한테서 자주 배운다.
우울이 심한 날에도 팥떡이 때문에 웃을 때가 있다. 정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날인데도, 간식 하나 앞에서 너무 진지해지는 얼굴이나 산책 나가기 전 몸 전체로 신나는 모습을 보면 잠깐은 웃게 된다. 그 웃음이 우울을 전부 밀어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완전히 가라앉아 있지는 않게 해준다. 어떤 날은 그 정도만으로도 꽤 크다.
사람의 스트레스나 두려움 같은 상태가 냄새로도 개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연구를 본 적이 있다. 우울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걸린다. 내가 안에서 계속 가라앉고 있는 날에도, 팥떡이한테는 그게 너무 많이 전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내 우울이 집 안의 공기처럼 남아서 팥떡이의 하루에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떤 날은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팥떡이를 위해 움직인다. 산책줄을 들고, 밥그릇을 채우고, 간식을 잘게 자르고, 발바닥을 보고, 귀를 만져본다. 대단한 마음으로 하는 일은 아니다. 그냥 팥떡이가 오늘도 평소처럼 신나고, 편안하고, 자기 하루를 좋아했으면 해서 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일들이 나한테도 돌아온다. 팥떡이를 챙기려고 움직이다 보면 나도 하루 안쪽에 조금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걸 적고 나면 보통은 어떤 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적어놓고 보면 답 같은 건 별로 없다. 괴로움은 액땜으로 견딘다고 했지만 다음번에도 통할지 모르겠고, 외로움이 평화의 댓가라고 적었지만 어떤 날은 그 평화가 너무 비어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날도 있다. 우울에 도가 텄다고 적었지만 어떤 시기에는 다시 첫 시기처럼 무너질 수 있는 일이고, 죽음을 출구로 두면 두려움이 줄어든다고 적었지만 그게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의 결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은 이 감정들이 내 안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어서, 다루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쪽에 더 가깝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살아도 안에서는 계속 가라앉고 있는 쪽이다. 끝나는 시점을 내가 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