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관계 안에서만은 자꾸 늦는다
후회를 두려워하고 관계를 잘라내는 쪽에 가까웠던 사람이, 한 개와 끝까지 남게 된 이야기
나는 원래 후회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관계가 조금씩 망가지는 걸 붙들고 버티기보다, 먼저 잘라내는 쪽이 늘 더 쉬웠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랬고, 어떤 종류의 연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번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버티는 것보다 정리하는 쪽을 택해왔다. 그런데 팥떡이만은 이상하게 그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이 글은 결국 그 예외가 내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 아침엔 팥떡이가 왜 그러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평일엔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산책을 나간다. 내 루틴이 바뀌었고, 팥떡이 루틴도 함께 바뀌었다. 평일엔 그 시간에 나가야 하니까 몸도 그렇게 맞춰지고, 하루도 그 시간부터 굴러간다. 그런데 주말엔 조금 다르게 하고 싶었다. 어차피 9시 좀 넘어서 반려견 놀이터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아침엔 짧게 쉬만 시키고 들어오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짧게 나갔다가, 쉬만 하고, 바로 들어왔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팥떡이가 엄청 낑낑댔다. 나는 또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더 놀고 싶어서, 루틴이 꼬여서, 주말인데 왜 벌써 끝났냐는 식으로 저러는 거겠지 하고 넘겼다. 나도 짜증이 났고, 기다리게도 했다. 오늘은 좀 늦게 쉬고 싶었고, 내가 정한 흐름대로 가고 싶었으니까.
근데 멈추질 않았다.
결국 나도 못 참겠어서 8시쯤 다시 밖에 나갔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팥떡이는 바로 약간 묽은 변을 봤다. 배가 아팠던 거였다. 그때부터 마음이 이상해졌다. 내가 왜 그걸 그렇게 늦게 알아들었을까. 왜 또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단정했을까. 루틴을 안 지키려 해서 짜증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냥 아픈 거였다. 오늘은 그래서 마음이 복잡하다. 나는 아직도 팥떡이의 소통을 자주 늦게 알아듣는다.
나는 원래 망가지는 걸 견디기보다, 먼저 잘라내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통제욕이 강한 사람이다.
후회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 두려워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또 관계에 대해서도 좀 복잡한 생각이 있다. 인간관계든 물건과의 관계든 뭐든, 무언가가 조금씩 망가지는 걸 잘 못 견딘다. 망가진 인간관계를 붙잡고 있는 것도 싫고, 흐트러지는 걸 보면서 버티는 것도 싫다. 그래서 차라리 먼저 잘라내고, 끊어내고, 새로 시작하는 쪽을 더 편하게 느낄 때가 많았다.
그게 내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관계는 결국 망가지거나 끊어진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실제로 지금 이 시점엔 그렇게 끊어진 관계들이 훨씬 더 많다.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다. 가족하고, 내 개 팥떡이뿐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양가감정도 심하다. 붙잡고 싶다가도 끊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다가도 망가질 것 같으면 먼저 물러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관계를 안정적으로 믿는 쪽의 사람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상한 건, 그래서인지 이미 어딘가 망가진 물건을 좋아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미 조금 망가져 있거나, 이미 내가 한 번 고쳐본 것들. 그런 걸 쓸 때 이상하게 마음이 놓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건 더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며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미 흠집이 있고, 이미 완벽하지 않고, 이미 한 번 깨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 오히려 덜 긴장하게 된다. 그 감각은 사람 관계랑도 닮아 있다. 나는 새것을 온전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앞에서 더 불안해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팥떡이는 원래 지나가는 관계였어야 했다
나는 팥떡이를 생후 3개월쯤 처음 만났다.
나는 2달 동안 임시보호를 했다. 원래는 그 뒤에 위탁시설로 갔어야 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내 개가 될 예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 관계는 지나가는 관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뒤에는 다른 일정이 있었고, 시설로 넘어가려면 중성화까지 마쳐야 했다. 그래서 팥떡이는 생후 5개월 무렵에 중성화를 했다.
근데 결국엔 위탁처에 같이 갔다가, 나는 차마 보내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데리고 차를 타고 돌아왔고, 그냥 내가 키우기로 했다. 이 선택은 지금 돌아봐도 내 성격과는 잘 안 맞는다. 나는 원래 끝낼 수 있는 관계는 빨리 끝내는 쪽이었다. 질질 끌고 가는 걸 싫어했고, 정이 들수록 더 빨리 잘라내고 싶어하는 순간도 많았다. 그런데 팥떡이만은 그게 안 됐다. 원래 지나가는 관계였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관계 하나만은 끝까지 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 관계가 내 성격을 거슬러 여기까지 온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결심해서 붙잡은 관계라기보다, 내가 끝내 잘라내지 못해서 남아버린 관계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한 문장으로 정리되진 않는다. 다만 분명한 건, 팥떡이는 처음부터 내가 잘할 수 있는 관계라고 확신했던 연결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계속 흔들렸고, 계속 고민했고, 끝까지도 "내가 잘할 수 있을까"를 의심했다.
내 첫 개인데, 나는 이 관계에 아쉬움을 하나라도 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팥떡이와의 관계 안에서 후회를 더 무서워했던 것 같다.
내 첫 개였다. 나는 이 관계에 아쉬움을 하나라도 덜 남기고 싶었다. 뭔가를 놓쳤다는 감각, 나중에 돌아봤을 때 "조금만 다르게 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문장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줄이고 싶었던 후회는 늘 지나가고 나서야 또렷해졌다.
조기 중성화가 그렇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이른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는 몰랐던 걸 나중에 하나씩 찾아보게 됐다.
내가 찾아본 것 — 중성화 시기
요즘은 예전처럼 모든 개에게 똑같은 시기를 일괄적으로 권하기보다, 나이만이 아니라 몸 크기, 품종, 성별, 생활 방식, 건강 상태를 같이 보고 더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쪽이 강했다. 미국 쪽 수의학 가이드라인을 보니 성견 때 20kg을 넘길 수 있는 개는 작은 개와 같은 기준으로 보지 않고, 특히 수컷은 성장 완료 시점인 9~15개월 이후로 미루는 쪽을 기본값에 가깝게 두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몸이 다 자라기 전에 중성화를 하면 관절이나 인대 같은 정형외과적 부담과 연결될 수 있어서, 그 시간을 더 신중하게 보자는 쪽이다.
중성화에서 얻는 이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이점은 "조기 중성화라서 특별히 얻는 것"이라기보다, 수컷을 중성화했을 때 전반적으로 따라오는 쪽에 가까웠다. 고환암 위험이 사라지고 양성 전립선비대 같은 문제 위험이 낮아지는 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행동 쪽은 더 복잡했다. 어떤 경우엔 수컷의 공격성이나 경쟁 행동이 줄어들 수 있지만, 그 변화는 일부 개에서만 보이고, 조기 중성화가 성견 중성화보다 행동 문제를 더 잘 예방한다고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행동은 개체차가 크고, 어떤 자료는 중성화 이후 공격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적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행동 하나만 보고 결정할 수 있는 일도, 건강 하나만 보고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 몸이 자라는 시간과 중성화의 일반적 이점, 그리고 개마다 다른 행동과 환경을 같이 저울질해야 하는 문제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지금 돌아보면, 조금 더 늦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다.
그렇다고 이걸 "그때 나는 틀렸다"라고 간단히 쓰고 싶지는 않다. 그때의 나는 넓은 선택지 안에서 고른 게 아니라, 정해진 일정과 조건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위탁시설로 가려면 중성화를 마쳐야 했고, 나는 그 시스템 안에서 최선을 고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게 죄책감의 문제라기보다, 몸의 시간과 사람 시스템의 시간이 어긋나는 문제로 남는다. 다만 분명한 건, 이 일을 지나오면서 나는 하나를 배우게 됐다. 후회를 줄이고 싶다고 해서 후회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 오히려 통제하고 싶어할수록, 이미 지나간 선택은 더 오래 남기도 한다는 것.
루틴이 바뀌고 나서, 나는 또 통제하고 싶어졌다
1달 전부터 팥떡이의 루틴이 크게 바뀌었다.
정확히는 내 루틴이 바뀌었고, 그 바뀐 루틴이 팥떡이에게도 그대로 들어갔다. 내가 이제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하루가 달라졌고, 산책 시간도 달라졌고, 쉬는 시간도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평소엔 얌전히 쉬던 저녁 시간에 팥떡이가 낑낑대기도 하고, 놀자고 하기도 하고,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나를 깨우는 날도 생겼다.
나는 그냥 새 루틴에 적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개는 사람의 생활 방식 변화에 꽤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그런데 오늘 같은 날을 겪고 나면, 내가 적응이라는 말로 너무 쉽게 넘긴 건 아니었나 싶어진다. 팥떡이가 보내는 신호를 정말 루틴 적응으로만 봐도 되는 건지, 아니면 그 안에 불편함이나 배 아픔이나 다른 어려움이 섞여 있는 건지, 나는 아직도 자주 헷갈린다.
그리고 그 헷갈림 앞에서, 나는 늘 조금 더 통제하고 싶어진다.
일정을 지키고 싶고, 예외를 줄이고 싶고, 내가 정한 흐름대로 하루를 굴리고 싶어진다. 아마 후회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산다. 무너질 수 있는 것들을 미리 정리하고, 변수들을 줄이고, 흐름을 붙잡고 있어야 덜 불안하니까. 그런데 개와 함께 사는 일은 자꾸 그 통제를 깨뜨린다. 몸은 늘 계획보다 먼저 말하고, 소통은 늘 내가 원하는 시간표대로 오지 않는다.
나는 불확실함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를 너무 쉽게 진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 안에는 분명 불확실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후회를 싫어하는 마음, 관계가 조금씩 흐트러지는 걸 못 견디는 마음, 끝이 안 보이는 관계를 버티기보다 차라리 먼저 끊어내는 쪽이 편한 마음. 이런 것들은 때때로 불안을 다루는 방식과 닿아 있다. 겉으로는 단호함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이 상태를 더는 견딜 수 없다"는 긴장일 수도 있다.
완벽하게 하고 싶었던 마음도 비슷하다.
내 첫 개인데, 하나라도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고, 틀리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 덜 후회하고 싶었다. 근데 그런 마음은 종종 이상한 방향으로 커진다. 한 번의 오해를 큰 실패처럼 느끼게 만들고, 하나의 아쉬움을 전체 후회처럼 부풀리기도 한다. 중요한 건, 내 머릿속에서 어떤 일들은 실제보다 더 크고 더 치명적인 일처럼 번질 때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일을 더 오래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짧은 오해 하나였을 수도 있다. 늦게 알아차렸고, 결국은 해결됐고, 팥떡이는 배변을 했고, 지금 당장 큰 일이 난 건 아니다. 근데 내 안에서는 그 장면이 너무 쉽게 커진다. 나는 왜 또 늦었지, 왜 또 단정했지, 왜 저 소통을 못 알아들었지. 이런 식으로. 후회를 줄이고 싶어서 더 통제하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성향 때문에 나는 더 자주 후회하게 된다.
나는 내 정신 상태가 관계 바깥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여기서부터는 개 얘기만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사회적인 자리에 나가는 것도 쉽게 피곤해진다. 사람 많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금방 예민해질 때가 있고, 어떤 날은 별일이 없어도 이미 신경이 바짝 서 있는 상태로 밖에 나간다. 겉으로는 그냥 조용히 걷고 있는 것 같아도, 안에서는 이미 시선이 날카로워져 있고 작은 소리에도 먼저 반응하고 있다. 나는 그걸 오래도록 그냥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팥떡이와 살다 보니까, 그게 단순히 내 안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보게 됐다.
내가 긴장한 날엔 팥떡이도 세상을 더 날카롭게 읽는 것 같았고, 내가 예민해진 날엔 팥떡이도 더 빨리 흔들렸다. 내 상태가 팥떡이한테 번진다는 걸 인정하는 건 꽤 불편했다. 나는 한동안 팥떡이 상태만 읽으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 상태도 같이 봐야 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조금 선명하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산책하다 보면 팥떡이가 가끔 어떤 사람에게 뜬금없이 짖거나 몸을 앞으로 던질 때가 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나 역시 지나가다 거슬리는 사람이나 좁은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보면 순간적으로 신경이 곤두서고, 속으로 날 선 욕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오늘은 특히 그 감정이 올라오는 바로 그 순간, 팥떡이도 같은 대상을 향해 달려들며 짖었다.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묘하게 겹쳐 보였다. 같이 살면서 서로를 닮아가는 걸까 싶었고, 동시에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이 팥떡이에게도 어떤 공기로 전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감정 고백이 아니라, 자기인지에 가깝다.
나는 내 정신 상태가 관계 바깥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내 긴장, 내 예민함, 내 통제욕은 결국 같이 사는 존재에게도 스며든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쪽으로만 돌리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상태일 때 세상을 어떻게 읽는지 알고, 그 읽는 방식이 팥떡이에게 어떤 공기를 만들 수 있는지 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팥떡이를 훈련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먼저 덜 날카로워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팥떡이 때문에 내가 배우는 건 개 훈련만이 아니다. 조금 더 천천히 살아야겠다는 것, 내 신경을 전부 바깥에 세우고 걷지 않아야겠다는 것, 내가 먼저 덜 예민해져야 한다는 것. 팥떡이를 돌보는 일이 결국 내 마음 건강과도 닿아 있다는 걸, 나는 요즘 아주 자주 느낀다.
나는 후회를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이 관계 안에서만은 자꾸 늦는다
오늘 아침 일은 아주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짧은 오해였고, 조금 늦게 알아차렸고, 결국 해결됐다. 근데 나는 그 일을 그냥 작은 해프닝처럼 넘기지 못한다. 아마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후회를 빨리 크게 느끼고, 실수를 오래 붙잡고, 같은 장면을 자꾸 다시 보는 사람. 그래서 이 관계 안에서도 자꾸 늦게 알아듣고, 늦게 반성하고, 늦게 배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상한 건, 나는 원래 그런 관계를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망가질 것 같으면 먼저 끊어내고, 더 복잡해지기 전에 정리하고, 이미 틀어진 연결 앞에 오래 서 있지 않는 쪽이 더 편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팥떡이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보내기로 했던 개를 끝내 못 보냈고, 실수할까 봐 무서운 관계를 끝내 놓지 못했고, 계속 미안해하면서도 계속 같이 살고 있다. 이건 내 성격으로는 좀 이상한 일이다.
아마 그래서 이 관계가 나를 바꾸는지도 모르겠다.
후회를 없애는 방법을 배우게 해주는 게 아니라, 후회가 남아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게 해준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잘못 읽어도, 어떤 선택이 지나간 뒤에 아쉬움으로 남아도, 그걸로 끝나지 않는 관계가 있다는 걸. 나는 아직도 후회를 두려워한다. 여전히 통제하고 싶고, 여전히 끊어내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이 관계 안에서만은 자꾸 남는다. 아마 이 글은 결국 그 이상함에 대한 기록이다.
